사회적 논란과 찬˙반 대결로 뜨거웠던 간통죄가 마침내 폐지됐다.

 

 

 2015.2.26일의 헌법재판소의 간통죄 위헌 심판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이슈한 사건중의 하나로 기억될것 같다.

 

간통죄 위헌 제소 심핀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90년 부터 가장 최근인 2008년 까지 네차례에 걸쳐 간통죄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려온바 있다.

  

 

2007년 당시 연예인 옥소리가 남편인 배우 박철로 부터 간통혐의로 고소당하면서 세상을 놀라게 한적이 있었는데, 당시 옥소리는 간통죄 위헌심판 제청을 신청해 간통죄 폐지 논란에 불씨를 지피우며 사회적 이목을 한몸에 받았었다.

 

결국 위헌심판에서 4번째 합헌 결정이 났지만 정족수 6명에 1명이 부족해 가까스로 합헌 결정이 난 것으로 기억된다.

 

이러한 분위기가 오늘에 이르러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이 내려진것 같다.

 

신문 1면에 보도된 바와 같이 재판관 7:2의 의견으로 결론이 났다.

 

그동안 간통죄가 간통을 효과적으로 예방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론이 든다.

간통죄가 폐지됐다고 해서 배우자 부정이 갑작스럽게 늘어난다고는 생각치 않는다.

 

1960년대 당대 최고 영화배우인 최무룡과 김지미의 불륜 사건이 신문 1면에 대문짝만한 사진을 장식하였는데, 당시 사진을 보면 정작 본인들은 수갑을 차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면서 유치장으로 향하는 장면이 있다.

 

그 사진을 보며 성적 자기결정권이 우선인지 가정보호가 우선인지 많은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간통죄가 폐지 되든 존속되든 어떠한 형태로도 문제점은 발생한다. 

 

본인이 사는  삶은 자신의 의지와 성숙한 의식을 함양하고 배양하는 것이 더 좋은 해결책이 아닐까 생각한다.

       

by 은용네 TV 2015. 2. 26. 20:50

최불암의 어울림 38회에서는 1991년 9월 북한내부에서 김일성 부자를 제거하기 위한 암살계획에 주동자로 활약한 북한군 엘리트 임영선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방영된다.

 

1993년 북한에서 탈출해 우여곡절을 겪으며 남한으로 망명한 북한 정치 망명 1호로 알려진 임영선에서 북한군사 전문가로 변신한 그의  이야기가 심도있게 최초로 공개 된다.

 

김일성에게 "영웅" 칭호를 받은 건축가 아버지 밑에서 자란 임영선은 평양체육관 공사중 대형사고가 발생하여 당시 설계자 였던 아버지가 하루아침에 영웅 칭호를 압수 당한 후 함경북도로 추방 됐다.

 

촌 구석에서 평양에서 온놈(양놈)으로 불리며 놀림을 받고 무시받았던 그는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강건 종합군관학교"에 입학하여 모범적인 생활로 김일성 일가의 사위후보로도 거론됐다고 한다.

 

그런던 중 마르크스 원서를 접하면서 북한 체제에 대한 현실을 깨닫고 김일성 부자에 대한 충성심은 사그러져만 갔고, "구국항쟁위원회"를 결성 북한 김일성 부자의 암살을 계획하게 된다.

 

1991년 9월 운명의 그날이 밝아왔으나 암살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사건이후 점차 조여오는 수사망과 미행, 도청 등이 이루어지자 그는 불안감에 자살을 생각하게 하는데 ---

 

그리고 그에게 떨어진 출장명령!! 체포를 직감한 그는 탈출을 결심하고 사선을 넘나드는 19일간의 우여곡절 끝에 결국 대한민국 땅을 밟게 된다.

 

대한민국에서의 생활은 결코 녹녹치 않은 과정이라고 말하는 그!!

 

얼떨결에 시작한 첫 사업의 성공 이후 줄줄이 사업실패를 하게되고, 이후 중국에 있는 탈북자들의 현실을 접하게 되면서 탈북사업에 나선다.

 

대북컨설팅 사업을 시작, 남한에 있는 탈북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는 그의 이야기가 한편의 인생스토리가 되어 우리에게 들려준다.  

    

by 은용네 TV 2015. 2. 23. 22:36

 

조선시대 베스트셀러 "징비록"은 구국의 영웅 서애 류성룡이 임진왜란의 발발 원인과 전황 등을 세세하게 그려낸 역사 기록서이다.

 

 

전쟁을 일으켰던 일본에 유출되며 조선 징비록 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고 일본인들 사이에서 선풍적으로 인기를 끌었고, 18세기에는 청나라 중국을 거쳐 동아시아까지 널리 퍼졌다.

 

조선의 국정을 담은 책으로 비밀문서와도 같이 엄격히 관리되어 왔던 징비록이 일본에 유출되어 그들의 역사인식을 바로 잡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니 참 아이러니하기만 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기전 조선 조정은 당파싸움이 치열했던 때로 정여립의 난 등 시대적 상황이 극한까지 다다른 위태로운 시대였다.

 

우리나라 18대 명현중의 한분으로 유학자며 정치가로 이름높은 율곡 이이는 병조판서로 재직시 일본을 경계하여 10만 대군 양병설을 주장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딱 10년전이다.

 

 

그 당시 사회상황이 어려웠던 관계로 10만 양병설은 무리였고, 특히 동인이었던 서애 류성룡이 반대하고 나섰다.

 

만약 율곡 이이의 말대로 10만 대군을 양성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시대상황이 어려웠더라도 장기적으로 매년 1만명씩만 양성했더라면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임진왜란으로 조선의 전 국토가 피폐화 되었고, 문화재 수탈 및 파괴, 인명 살상 등 전란으로 인한 피해는 10만 양병을 키우는 것보다는 10배, 아니 100배 더 피해가 심했을 것이다.

 

 

그 당시 영의정이자 전쟁 총지휘관으로 국정을 지휘했던 류성룡!!

 

전쟁을 이기는 방법은 바로 사람에게 달려 있다는 그의 지론은 전쟁중에도  먹어야하고, 잘 먹어야 민생도 안정되고 나라를 지킬수 있다는 생각으로 솔잎가루를 이용한 구휼방법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국방력을 높이는 방안으로 조선 최초로 월급을 주고 군사를 키우는 일종의 직업군인 제도라 할 수 있는 훈련도감 창설을 제안 했다.

 

비판과 냉소를 무릅쓰고 전란극복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임진왜란 같은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경계와 교훈을 후손에게 남긴 그의 위대한 유산"징비록"

 

 

tv 대하드라마로 제작되어 현재 방영되고도 있는 징비록은 우리가 무엇을 경계하고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가르켜 준다.   

        

by 은용네 TV 2015. 2. 22.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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